숙명통에 흔적없는 흔적이 남음으로 활용력이 커지니

뭐든지 그래요. 필요한 것이 있잖아요. 필요한 것을 자기가 마음에서 알죠. 뭐가 필요한지 압니다. 알면 걱정을 안하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어도요 그게 와요. 그런데 이것이 빨리 어느 시간에 꼭 있어야한다, 어째야 된다 그러니까 안오는 거죠. 벌써 내면에서 필요한거 자기가 압니다, ‘뭐가 필요한데...’그러면은 가만히 있으면 와요.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은 안오는지 모르겠네요. 난 이때까지 안 오는 것 못 봤으니까. 오든가요? (대중가운데서: 네) 그러니 뭘 걱정합니까? 내면이 전 우주하고 통신이 되고 있는데... 통신이 돼서 전 우주가 다 자긴데. 우주가 다 자기기 때문에 자기가 뭐 필요하다고 하면 '여기 있다' 하면서 얼른 주는데. 모든 게 다 그래요. 지혜를 내는 것도 그렇고 다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 해 나가면서 체험을 해가면서 살다가 보면은 '아! 이렇게 다 한 생각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구나.'하고 알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 하나 체험을 해가는 거죠.
 
그 빈 공간에, 빈 백지에 자꾸 한 생각 해가면서 체험을 해가지고 도장을 찍습니다. 그 자기 흔적을 탁탁 남겨요. 그런데 흔적 없는 흔적이 남아요. 그게 숙명통에 누적이 되는 거죠. 그런데 흔적 없는 흔적이 남는데, 숙명통에 이게 기록이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흔적 없는 흔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 업식이 아니예요. 그 이면에 불법(佛法)이 달라붙어있으면 이게 업식이 아니고, 그것이 없으면 고정되게 되어버리니까 이게 업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흔적 없는 흔적이 머무른바 없이 머물러져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그것이 흔적없는 흔적이 있기 때문에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커집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지혜나 활용력이나 모든 능력이 커지는 거죠.
 
그런데 그것도 흔적없는 흔적이 고정되어있지는 않아요.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거하고 이것을 봤다, 그러면 이거 하고 이것을 봤는데 보고 이거하고 이것만 써먹는 것이 아니라 제3의 등장인물이 나와요. 제3의 물건이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 알겠죠? 그러하듯이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또 더 다른 것을 알아 가고 알아 가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본래 그 알아가고 하는 데에는 끝이나 한계 같은 그런 건 없어요. 본래 터전이, 본질이 공했으니까.
 
그렇게 본질이 공했기 때문에 흔적만 있는 거죠. 흔적이 찍히고 쓰고, 또 찍히고 쓰고, 찍히고 쓰고 무한량 그렇게 쓰고 있는데, 잘못된 거나 이런 것들도 다 놓아버리면 그냥 또 흔적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흔적이 없는 흔적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래 죄가 없는 거죠. 그래서 병이나 이런 것들도, 사실은 병이라고 하는데 병이 없는 병이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걸 몰라버리면요 오히려 병은 없습니다. 몰라버리면. 그런데 알아가지고 자꾸그 쪽으로 자기가 몰고 가니까 병이 나는 거예요. 병을 집착하고 있는거죠. 병을 가지고 병을 살리는 거예요. 몰라 버리거나 아예 관심을 주지 않으면 오히려 병은 그냥 없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을 말입니다. 
(2007.1.19 초하루법회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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